거제 조선소에 울린 구조 신호
짙은 회색 안개가 거제 앞바다를 덮던 그날 아침, 공기는 이상하리만큼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잔잔한 파도 소리 너머로 쇠붙이가 부딪히는 둔탁한 울림이 들려왔다.
10월 17일 오전 10시 40분, 한화오션 거제사업장. 협력업체 소속 60대 근로자가 시스템 발판 구조물 설치 작업 중이었다. 그리고 불과 몇 초 뒤, 거대한 철 구조물이 균형을 잃었다.
“위험해!” 누군가의 외침이 메아리쳤지만, 너무 늦었다. 구조물은 그대로 그를 덮쳤다. 철이 부딪히는 소리, 바닥을 차는 발소리, 누군가의 떨리는 손. 그 순간 조선소의 소음은 멎었다.
그는 숙련된 사람이었다. 20년 넘게 철과 함께 일해온 베테랑.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그는 늘 같은 자리에서 묵묵히 구조물을 맞추고 볼트를 조였다. 동료들은 그를 “형님”이라 불렀다. “말수는 적지만 손이 정확했죠. 늘 먼저 나와 있었어요.” 한 동료의 말은 잠시 공기 속에 머물다 사라졌다.
구급차가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사람들은 그를 태운 구급차가 멀어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 시간 뒤, 병원에서 들려온 짧은 한 문장.
“사망하셨습니다.”
그날의 바람은 유난히 싸늘했다. 햇살이 비쳤지만 온기가 없었다. 사람들은 안전모를 벗고 침묵했다. 기계의 진동이 멎은 조선소엔, 묘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누군가는 낮게 말했다.
“또 한 명이 갔네. 이번엔 왜 막지 못했을까.”
그 말은 바람처럼 흩어졌지만, 누구도 잊지 못했다.

그는 늘 조용했지만 누구보다 성실한 근로자였다
사고 이후, 한화오션은 모든 작업을 즉시 멈췄다. 김희철 대표는 사과문을 내고 “유가족께 깊은 애도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정확한 원인 규명과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약속이 뒤따랐다. 하지만 현장의 분위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안전교육이요? 솔직히 형식적이에요. 종이에 서명만 하면 끝이에요.” 한 협력업체 직원은 씁쓸하게 웃었다. “누가 위험을 말해도, 일정이 우선이죠. 오늘 못 하면 내일 공정이 밀리니까요.”
사고 현장에는 그가 쓰던 장갑 한 켤레가 남아 있었다. 한쪽은 구겨져 있었고, 다른 한쪽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옆에는 낡은 공구함이 놓여 있었다. 그 손으로 수많은 배를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자신을 지킬 시간은 없었다.
오후가 되자 경찰과 고용노동부 조사관들이 도착했다. 붉은 경고선이 쳐졌고, 카메라 셔터 소리가 바람에 섞여 울렸다. 발판의 결함, 지시 체계, 점검 과정 하나하나가 다시 검토됐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묻는다.
“왜, 매번 같은 이유로 사람이 죽어야 합니까?”
조선업은 한국의 자존심이라 불렸다. 하지만 그 영광 뒤에는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있다. 위험은 외주화되고, 책임은 희미해진다. 계약직, 하청, 재하청으로 이어지는 구조 속에서 안전은 늘 마지막 순서로 밀린다.
“그날도 그는 그냥 일하러 갔을 뿐이에요. 늘 그렇듯, 묵묵하게요. 그런데 돌아오지 못했죠.”
유가족의 말은 길지 않았지만, 현장에 있던 모두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밤이 되자 조선소의 불빛이 하나둘 꺼졌다. 남은 사람들은 담배 한 개비로 긴 하루를 마무리했다.
“언제쯤 이런 일이 멈출까요.”
그 물음은 바다로 스며들었다.
사라진 산업안전의 약속, 반복된 죽음이 던진 질문
결국 이번 사고는 하나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산업현장이 여전히 풀지 못한 질문을 남긴다.
‘일하는 사람의 죽음은 왜 이렇게 익숙해졌을까?’
한화오션은 “비상대책본부를 구성해 근본적 안전관리 체계를 재정비하겠다”고 밝혔다. 협력업체의 작업 환경 전반도 점검할 계획이다. 하지만 현장의 노동자들은 여전히 불안하다.
“서류로만 존재하는 안전은, 안전이 아니죠.”
한 관리자의 말은 담담했지만, 뼈 속 깊이 파고들었다.
안전은 시스템이 아니라 태도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태도는 사람을 존중할 때 만들어진다. 하지만 지금의 조선소는 여전히 속도를 재촉하고, 비용을 계산한다. 그 사이에서 생명은 숫자로 취급된다.
붉은 석양이 조선소를 물들일 때, 철 구조물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 아래서 노동자들이 하나둘 작업복을 벗었다. 누군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오늘은 다행히 무사했네요.”
짧은 말이었지만, 그 속엔 하루를 버틴 사람들의 안도가 담겨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을 오래 바라봤다. 쇳내 나는 공기, 미세한 먼지, 묵묵히 걷는 사람들의 어깨.
그의 이름은 이제 뉴스 속 몇 줄로 남겠지만, 그가 흘린 땀과 숨결은 여전히 철판 위에 묻어 있을 것이다.
진실은 언제나 느리게 온다. 그러나 그 느린 걸음이, 언젠가 세상을 바꾼다.
그의 침묵은 단지 슬픔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던져진 질문이다.
우리는 언제쯤, 진짜 ‘안전한 일터’를 만들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