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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 남겨진 길의 온도

by jeongwonn1 2025. 11. 12.

처음 걷는 길 위에서

한동안은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눈을 떠도 피곤했고,
움직이는 게 버겁고
그냥 하루가 지나가길 기다리며 누워 있었다

사람이 이렇게 조용히 무너질 수도 있구나 싶었어
무너지는 소리조차 없이
그냥 조금씩 꺼져가는 느낌이었거든

어느 날, 이상하게 창밖이 눈에 들어왔어
햇빛이 커튼 사이로 비치는데
먼지가 천천히 떠다니더라
그걸 보고 있자니,
잠깐 밖으로 나가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
그게 다였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움직였지

신발을 신으면서 괜히 망설였어
괜히 나가봤자 뭐하나 싶었는데
그래도 발이 먼저 나가더라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치는데
그 느낌이 참 오래간만이었어

거리는 조용했어
멀리서 들리는 차 소리,
어디선가 나는 빵 냄새,
햇살이 바닥에 부딪히는 그 색감
그게 괜히 반갑더라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인데
나만 멈춰 있었던 것 같았거든

발자국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어
내가 걸은 만큼 남는 흔적,
누구도 대신 찍을 수 없는 나만의 기록
조금 엉성해도 괜찮겠지
그래도 내가 걷고 있으니까

사람들은 말하잖아
다시 시작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고
근데 난 몰라
내겐 용기보다 그냥 한 걸음이 필요했던 것 같아
크게 뭔가 결심하는 게 아니라
그냥 오늘 하루를 버티기 위한 한 발자국

걸으면 걸을수록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워졌어
누군가와 함께 걸었던 길도 보이고
그때 웃던 기억이 불쑥 떠오르기도 하고
그런데 신기하게 아프진 않았어
그냥, 묘하게 따뜻했어
그 사람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는 듯한 느낌이었거든

햇살이 어깨 위에 닿았어
그 온도가 조금 낯설었지만
그게 나쁘지 않았어
잠시 멈춰서 하늘을 올려다봤지
맑지도 않고, 탁하지도 않은 하늘
그냥 평범한데 이상하게 편했어

그제야 알겠더라
새로 시작한다는 건
큰 다짐이 아니라
그냥 이렇게 다시 걸어보는 거라는 걸
한 걸음,
또 한 걸음,
아주 조용히,
그게 내 첫 번째 발자국이었어

다시 남겨지는 길들

이제는 걷는 게 조금 익숙해졌다
처음엔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라서
그냥 발이 닿는 대로 걸었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그 길이 조금씩 나를 기억하는 것 같아

아침 공기가 다르다
예전엔 그저 차갑기만 했는데
이젠 그 안에 묘하게 따뜻한 냄새가 섞여 있다
빵 굽는 냄새,
젖은 나무 냄새,
그리고 어제 내린 비가 남긴 촉촉한 공기
그 속을 걷는 게 좋다
조용하고,
괜히 마음이 평온해진다

발자국이란 게 참 신기하다
누군가는 지나가며 남기고,
누군가는 그 위를 다시 밟는다
사라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겹쳐져 가는 거겠지
어쩌면 지금 내가 걷는 이 길에도
누군가의 발자국이 남아 있을지도 몰라
그 위를 밟고, 또 내 흔적을 남기면서
우리 모두 어딘가로 향하는 중일 거야

가끔은 멈춰서 뒤를 본다
처음 걸었을 때보다
발자국이 조금 더 단단해진 것 같아
비틀거리던 걸음이
이제는 조금씩 중심을 잡는다
이상하게 그게 대견하다
누구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내가 나를 조금씩 일으켜 세우고 있다는 게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를 보면
모두가 바쁘게 지나간다
누군가는 급히 뛰고,
누군가는 멍하니 걷고
그 속에서 나도 그냥 한 사람으로 섞인다
그게 좋다
이젠 혼자 있어도 덜 외롭다
사람 사이를 스치는 바람에도
이상하게 온기가 느껴진다

한참을 걷다 보니
낯선 골목이 나왔다
벽에 오래된 포스터가 붙어 있고
구석엔 작은 고양이가 웅크려 있었다
햇살이 그 고양이 털 위에 닿으며 반짝였다
그걸 보는데
괜히 웃음이 났다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좋았다

나는 여전히 그 사람을 완전히 잊은 건 아니야
하지만 예전처럼 아프진 않아
이제는 그 기억이 조금 따뜻해졌어
그 사람과 함께 남겼던 발자국 위로
새로운 내 발자국이 하나씩 겹쳐지는 느낌이랄까

그게 나쁘지 않다
그렇게 조금씩 걷다 보면
언젠가 이 길이 나만의 길이 되겠지
그리고 그 길 끝에서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하늘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발자국이 남긴 시간

어느새 많이 걸어왔다
이 길이 처음이 아니란 걸
이제는 안다
처음엔 버티듯 내딛던 걸음이
이제는 자연스러워졌고
그걸 깨닫는 순간
가슴 어딘가가 살짝 따뜻해졌다

예전엔 자꾸 뒤를 봤다
그 사람의 흔적이 있을까 싶어서
그 길 위에서 멈춰 서 있던 시간도 길었지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나름의 과정이었구나 싶다

발자국이라는 게 그렇다
그때의 마음, 그때의 생각
그 모든 게 그 자리에 남는다
지워지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색만 바뀔 뿐
그 흔적은 여전히 남아
어떤 날은 희미하게,
어떤 날은 뚜렷하게

가끔은 그 길을 다시 걸어본다
예전처럼 아프지 않고
조금은 웃으면서
아, 내가 여기서 멈췄었지
여기서 울었고,
여기서 다시 걸었구나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구나
그런 생각이 문득 스친다

하늘은 여전히 비슷한 색인데
내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다르다
똑같은 거리, 똑같은 바람인데
이제는 그 안에서 평온이 느껴진다
무언가 끝난 자리에
새로운 시작이 살짝 피어나는 기분이랄까

누군가 내게 물었다
이제 괜찮냐고
나는 잠시 웃었다
괜찮다는 말보다
그냥 “조금 나아졌어요”
그게 더 솔직한 대답일 것 같았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남는 발자국들이 있다
지우려 해도, 다시 밟아도
사라지지 않는 흔적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게 꼭 나쁜 건 아니라는 걸
그건 내가 살아왔다는 증거고
누군가를 마음 깊이 사랑했다는 표시니까

오늘도 걷는다
조금은 느리게,
가끔은 멈춰 서서
발밑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이 길 끝에 뭐가 있을진 모르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다
발자국이 나를 이끌 테니까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가 내 뒤를 걷다
내 발자국을 발견할지도 모르겠지
그때 그 사람이
이 길이 외롭지 않았다고 느낀다면
그걸로 충분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