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늘한 공기 속, 서천의 첫 만남이 비극으로 끝나다
짙은 새벽 안개가 마을을 덮고 있었다. 충남 서천의 좁은 골목은 고요했고, 먼 데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만이 이른 아침의 공기를 채웠다. 그 평범한 새벽이, 한 여성의 마지막 시간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피고인 이지현(34)은 그날 처음 만난 여성을 살해했다. 이유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검찰은 항소심에서 이지현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하며 전자발찌 부착 명령까지 요청했다. “계획적이고 잔혹한 범행이었으며, 재범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였다.
사건이 알려지자, 마을 사람들은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그 여자는 그냥 길을 걷고 있었을 뿐이었어요.” 한 주민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날 이후, 서천의 거리에는 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사람들은 낯선 이의 발자국에도 불안을 느꼈다. 누군가는 문을 이중으로 잠그고, 누군가는 밤마다 창밖을 확인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하늘은 어떤 색이었을까.
그 질문 하나가, 아직도 서천의 밤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시흥의 정적, 두 생명이 꺼진 자리 — “그 순간, 모든 게 멈춘 것 같았다”
며칠 후, 경기 시흥에서 또 다른 살인의 소식이 들려왔다. 이번엔 중국 동포 두 명이 희생됐다. 피고인 차철남은 그들을 치밀하게 유인해 살해했다.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다.
“그 순간, 모든 게 멈춘 것 같았다.”
현장을 목격한 한 사람의 증언이었다. 그는 사건 직후에도 손이 떨려 담배를 붙이지 못했다고 했다.
수원지법 안산지원 형사1부의 법정 안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검찰은 “피고인은 인간의 기본적 존엄을 무참히 짓밟았다”고 말했다. 피고인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명이 밝게 비추는 법정 한가운데, 그의 그림자만 길게 늘어졌다.
사람들은 온라인에서 분노와 두려움을 동시에 토했다. “사형은 너무 가혹하다”는 의견과 “이런 범죄에 사형 말고 대안이 있느냐”는 목소리가 엇갈렸다.
한 시민은 SNS에 이렇게 썼다. “우리가 잔혹함에 무뎌지고 있는 건 아닐까. 뉴스에서 살인 소식을 듣고도 밥을 먹을 수 있는 이 현실이 더 무섭다.”
그 말은 오래 남았다.
이런 사건이 반복될 때마다, 사람들은 묻는다.
정의란 도대체 무엇일까. 처벌은 복수인가, 보호인가.

김포의 가족 참극, 그리고 남겨진 사회의 질문
하지만 그로부터 며칠 뒤, 또 다른 소식이 전해졌다. 경기 김포에서 30대 남성이 부모와 형을 살해했다. 그리고 인천 부천에서는 또 다른 A씨(36)가 가족을 살해했다.
검찰은 두 사건 모두에서 사형 구형과 전자발찌 부착을 함께 요청했다. 법원은 여전히 고뇌했다. 인간이 인간을 해치는 그 잔혹함 앞에서, 법은 얼마나 무력한가.
피해자의 가족들은 말 대신 울음을 삼켰다. “그가 왜 그런 일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평범한 아들이었는데…” 한 지인은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날 이후, 김포의 한 주택가에는 검은 천이 걸렸다. 바람에 펄럭이는 천은 마치 멈춰버린 시간의 조각 같았다.
사람들은 묻는다. “가족을 해친 사람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까?”
결국, 인간의 가장 깊은 어둠은 가까운 곳에서 피어난다.
그 어둠은 점점 번져 사회의 신뢰를 흔든다.
누구나 불안해했다. 이웃이, 친구가, 혹은 내 가족이 언제 돌변할지 모른다는 생각.
법정은 냉정하지만, 사회는 이미 뜨겁게 흔들리고 있었다.
잔혹함의 시대,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결국 이번 사건들이 남긴 건, 단순한 처벌의 문제가 아니었다.
서천의 밤공기, 시흥의 침묵, 김포의 붉은 노을 — 그 모든 장면은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서로를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
무기징역과 사형, 전자발찌 부착 명령이 이어지고 있지만, 범죄의 근원은 사라지지 않는다.
심리학자들은 “극단적인 범죄는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사회적 고립의 결과”라고 말한다.
지나친 경쟁, 고립된 인간관계, 무너진 공동체의 온기.
그 속에서 분노는 조금씩 응고되어, 결국 폭력으로 터진다.
나는 생각했다.
법정은 정의를 세우지만, 사회는 사람을 세워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서천과 시흥, 김포가 생길 것이다.
밤이 깊어갈수록 도시는 조용했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은 여전히 울리고 있었다.
그날의 침묵은, 오히려 더 큰 울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