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로맨스 스며든 거짓의 온기
짙은 밤이었다. 휴대폰 화면 속 그는 언제나 다정했다. “오늘도 당신 생각뿐이에요.” 그 문장은 하루의 끝을 달래는 위로였다. 따뜻한 말들이 마치 진심처럼 느껴졌고, 화면 속 웃음은 현실보다 더 현실 같았다. 하지만 그 다정함 뒤에는 차갑게 계산된 목적이 숨어 있었다.
서울동부지법 형사11부는 최근 캄보디아를 기반으로 한 로맨스 스캠 조직원들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주범 격인 32세 서모 씨에게 징역 6년, 다른 4명에게는 3~4년의 징역형이 내려졌다. 그들은 모두 사랑을 미끼로 한 범죄 조직의 일원이었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40~60대의 중장년층이었다. 외로움 속에서도 누군가 자신을 알아봐주는 듯한 말에 마음을 열었다. 낮에는 일상에 치이고, 밤에는 홀로 남는 시간에 들려오는 다정한 메시지. “당신의 하루가 궁금해요.”, “한국에 가면 꼭 만나고 싶어요.”
그렇게 신뢰는 만들어졌고, 돈은 서서히 빠져나갔다.
“진심이라 믿었어요. 그 사람은 내 하루의 이유였거든요.” 한 피해자는 재판이 끝난 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은 묻는다. 어떻게 속을 수 있었냐고. 하지만 외로움과 그리움의 틈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 질문의 무게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고, 피해자들의 눈빛은 오래된 후회와 분노, 그리고 씁쓸한 체념이 섞여 있었다. 사랑이라 믿었던 감정이 한순간에 ‘범죄의 흔적’으로 바뀐 순간, 그들의 세상은 조용히 무너졌다.
사람들은 조용히 숨을 고르며, 그날의 판결을 지켜봤다.

사랑의 가면을 쓴 조직
이 범죄 조직은 캄보디아 프놈펜에 거점을 두고 있었다. 이들은 국내외 피해자에게 접근해 가짜 신분으로 친밀감을 쌓은 뒤, 병원비나 사업자금, 배송비 등의 이유로 돈을 요구했다. 피해액은 수억 원대. 일부 피해자는 전 재산을 잃기도 했다.
조직의 체계는 철저했다. 감정을 자극하는 대화 담당, 사진·영상 제작팀, 자금 세탁 담당, 그리고 대포통장 모집책까지 세분화돼 있었다. 심지어 SNS 알고리즘을 이용해 ‘혼자 사는 사람’, ‘해외 근무 경험자’ 같은 키워드로 피해 대상을 골라냈다.
대구지법에서는 대포통장을 제공한 20대 두 명에게 각각 징역 4년 6개월을 선고했다. 그들은 처음엔 “잠시 돈이 필요해서 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그 단순한 거래 하나가, 수많은 피해자의 삶을 무너뜨렸다.
부산에서는 50대 남성이 스스로 경찰에 찾아와 자수했다. “내가 건넨 통장으로 그런 일이 벌어진 줄 몰랐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떨궜다.
검찰은 현재 해외 총책과 한국인 부총괄을 추적 중이다. 추가로 11명이 구속기소되었고, 경찰은 캄보디아 현지 수사당국과의 공조를 강화하고 있다.
이들의 대화방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수백 번 오갔다. 그러나 그 모든 말은 돈의 냄새로 이어졌다.
“그 순간, 모든 게 멈춘 것 같았다.” 피해자 중 한 명은 잔고가 0원이 된 휴대폰 화면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모니터 불빛만 남은 방 안에서, 사랑은 상품이 되었고, 감정은 도구로 쓰였다.
사람들은 여전히 묻는다. 이 모든 연극은 언제 끝나는 걸까?
인터넷 너머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언제부터 이렇게 차가운 흉기가 되었을까?
남겨진 마음의 온도
결국 이번 판결은 단순한 ‘사기 사건’의 의미를 넘어선다. 사람의 신뢰, 외로움, 그리고 디지털 관계의 취약함이 모두 드러난 사건이었다.
사랑의 형태가 온라인으로 옮겨진 시대, 사람의 감정은 더 쉽게 복제되고 더 쉽게 이용당한다. 누군가는 카메라 앞에서 웃고, 누군가는 키보드로 거짓을 쓴다.
그러나 그 뒤에는, 여전히 진심을 믿고 싶은 인간의 마음이 있다.
“그가 사기꾼이라는 걸 알았을 때, 돈보다 더 아까운 건 내 마음이었어요.” 한 피해자의 이 말은 이번 사건의 본질을 드러낸다.
로맨스 스캠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틈을 파고드는 심리의 문제다.
결국 사람은 연결을 원한다.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필요하다. 그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런 범죄는 또 다른 형태로 계속 나타날 것이다.
검찰은 이번 판결을 계기로 해외에 기반한 사이버 범죄 대응 시스템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제도보다 더 중요한 건, ‘의심의 감정’을 건강하게 갖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경계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외로움은 언제나 약점이 된다. 그리고 그 약점을 파고드는 범죄는 늘 가장 인간적인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나는 재판 후 법정을 나서는 한 피해자의 등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그 등에는 무너진 믿음의 무게가 그대로 얹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다시 누군가를 믿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날의 침묵은, 오히려 더 큰 울림이 되었다.
진실은 느리게 오지만, 언젠가 반드시 도착한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